'스승을 찾는 주간' 5학년 최은기 학생과의 만남
작성자
sora7712
작성일
2018-05-03 21:05
조회
284
과연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일이 쉬운가? 아니 인생의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스승은 넘치는데 스승은 없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생님이 내 인생에서 스쳐지나가지만 마땅히 스승이라고 지칭할 만한 이는 없을 수 있다.
중등칠보산자유학교 5학년 최은기 학생이 지난 주 내게 전화를 걸었다. 학교에서 ‘스승을 찾아서 주간’ 인데 나에게 글쓰는 것에 관심 있으니 조언을 해 달라는 거였다. 가르치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지만 딱히 나를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조언자나 강사 정도로 여길 뿐이다. 논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랬고, 토론이나 글쓰기를 지도하는 지금도 그렇다. 나 스스로도 나쁘지 않은 선생 정도이지 ‘스승’ 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같은 중등칠보산자유학교 학생 중 어머니가 책을 쓴 작가이니 한 번 만나보고 싶어서 연락을 해 온 것 같다. 재혁이에게 물어 보니 “은기 형 글 잘 쓰는 거 좋아해” 라고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와의 만남이라 다소 설렜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나 큰 준비 없이 만남을 가졌다. 두 번 정도 약속 시간이 바뀌어 5월 1일 노동절 날 오후 4시 30분, 학교 앞 가라지 카페에서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머리에 헬맷을 쓴 은기는 수줍게 인사를 하였다.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어색하게 자리에 앉아서 인사를 했다. (재혁이도 같이 와서 옆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맛있는 거 사줄게. 먹고 싶은 거 먹어” 라고 하니, “제가 사 먹어야 하는데...” 라고 한다. 먹어도 괜찮다고 했더니, 가장 싼 메뉴인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비싼 거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대신 초코 쿠키를 하나 더 사주었다. 차를 주문하고 인터뷰 할 준비를 하느라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는 모습이 긴장되어 보였다.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말을 했다.
다른 학년애들 여행 주간에 5학년은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의 스승을 찾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디자인, 자전거, 당구 등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아이들은 하나씩 골랐고 은기는 사실 정하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멀리 떠나는 것은 싫고, 뚜렷한 분야도 알 수 없고, 고민 끝에 그나마 글쓰는 것을 좋아하니 글쓰는 사람을 찾아보자고 하여 가까이에서 만나기 쉬운 ‘재혁이 엄마’인 나에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은기와 이야기나누면서 나 역시 꿈 없고, 목표없는 10대 시절을 보냈음을 알았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면 막상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고. 그나마 책을 좋아했고 선생님이 어문계열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하니 ‘국어국문과’를 간 것일 뿐이라고 했다. 대학 때는 논술 강사, 첨삭 아르바이트 하면서 했던 일이 졸업 후 오랫동안 직업이 되었고, 30살이 넘어서는 토론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맛있는 독서토론레시피’ 라는 첫 책을 출간하고 지금까지 총 7권의 책을 쓰게 되었다. 일기쓰기나 글짓기에서 초등학교 때 몇 번 상을 받았고, 학교 선생님도 “글짓기를 잘하는 어린이”라고 써주셨지만 직업이나 진로로 작가라는 꿈을 꿔본적 없다.
“나는 상상력이 부족해서 시쓰거나 소설 창작하는 것은 관심이 없어. 그냥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정리해서 책 쓰고 글을 쓸 뿐이야” 라고 했다. 그랬더니 은기 역시 창조하는 글보다는 자신이 경험하고, 생각하고, 관찰한 글이 좋다고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대화가 잘 맞는 듯했다.
이번에 출간한 <사이판한달살기>는 재혁이와 작년 1달간 여행간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독서토론이나 그림책 모임 등을 하면서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모든 것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경험’ 이 글의 재료다.
“은기도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면 좋을 것 같아. 작가는 꼭 직업이 아닐 수 있어. 돼지를 키우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글을 쓸 수도 있고,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하는 비정규직이 글을 쓸 수도 있고, 엄마가 글을 쓰기도 하고, 대안학교 선생님도 책을 쓸 수 있지. 여행을 갔다와서 글을 쓰는 것처럼... 카페 아르바이트 하면서 글을 쓸 수도 있고, 공장 일 하면서도 쓸 수도 있고. 그러니까 글쓰는 직업을 꼭 한정짓지 말고 경험 안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면 어떨까”
이렇게 글쓰는 직업에 대해 영역을 넓혀보라 했다. 은기 역시 뭔가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아직까지는 sns에 글을 쓰거나 공개적으로 오픈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글쓰기 채널이 필요하고 읽는 사람, 대상을 고려한 글쓰기가 필요하다. 학교 게시판이든 자신의 블로그든 페이스북, 브런치 등 다양한 곳에 글을 쓰는 훈련을 해보길 권했다.
“<30대백수 쓰레기의 일기>라는 독립출판물을 낸 30대 남자 작가가 있었어. 그 작가가 왕따에 백수에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 생각하고 좌절했는데, 블로그에 ‘30대 백수 쓰레기의 일기’ 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좋아요 누르고, 댓글도 달면서 점점 유명해졌거든. 나중에는 그래서 막노동한 돈으로 1달간 모아 독립출판물을 직접 만들고 책을 제작해서 팔기도 하고. 지금은 책방 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다른 일도 하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거지. 작가가 되는 때는 정해진 것도 없고, 글을 쓰면서 어떤 인생이 될지 정말 알 수 없는 거야”
우리는 직업을 거창하게만 생각한다. 글쓰는 것도 뭔가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재능이나 자격 조건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은기에게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내가 경험했던 글쓰기의 과정이다. 어릴 때는 일기쓰기를 좋아했고, 20대 때는 다이어리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나마 책을 처음 만들어 본 과정은 20살 러시아 여행갔던 일이 시작이었다. 선교여행이라 각자 역할이 있었는데 나는 단순히 국문과라는 이유로 ‘일지 담당’을 했다. 그날 그날 있었던 일, 만났던 사람, 먹은 음식, 활동 보고 등을 기록했고 나중에 돌아와서는 한 달 간의 기록을 복사물로 여행기를 제작했다. 이런 작은 경험이 모여서 나중에 글을 쓸 때 기초 체력이 된다. 김연아가 매일 시합만 나가는 게 아니라 평소에는 다양한 체력훈련을 하듯이.
질문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은기에게 언제부터 칠보산 학교를 다녔는지, 학교 수업에 대한 만족 등은 어떤지 물었다.
“엄마가 초등 칠보산 자유학교 선생님이셔서 1학년부터 지금까지 다녔어요. 지금은 엄마가 발도르프 공부하러 동생 데리고 독일 가셨어요. 지난 겨울 3개월간 독일 갔다왔는데 저는 독일보다 한국이 나아요.”
“아니, 엄마가 뒤늦게 발도르프 공부 하러 독일 가셨단 말이야? 다른 가족은 허락했고? 아빠도? 엄마의 학비랑 생활비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처음 반대하셨는데 아빠가 가라고 하셨어요. 칠보산 교사 하시면서 발도르프 교육을 공부하고 접했고 독일 가서 공부하고 싶은 꿈이 생기셨나봐요.”
“아니 은기 네가 엄마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되겠네! 우리 엄마의 진로찾기, 엄마의 발도르프 공부 경험기 이런 거 말야. 네가 경험한 칠보산 학교의 이야기. 초등부터 중등까지 과정을 모두 체험한 이야기. 너의 이야기를 쓰는 거야”
“아. 그거 좋겠네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은기의 엄마가 부러웠다. 자신의 꿈을 뒤늦게 찾고, 진짜 용기있게 독일로 떠나서 원하는 공부를 하는 모습. 막상 나 역시 ‘무얼 다시 배우고, 유학가서 공부하고 싶은 게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원기 엄마처럼 뚜렷하게 생각나는 게 없다.
“원기야. 너희 엄마도 40대가 넘어서 꿈을 찾은 거니까... 너도 지금 꼭 진로를 찾거나 꿈을 찾지 않아도 돼. 그냥 살다 보면, 글쓰기를 좋아서 하다 보면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 거야”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꼭 써 보라고... 자신이 직접 쓰는 것보다 제3자가 관찰자 입장에서 쓰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소감을 이야기해보라고 했더니,
“꿈을 못 찾고, 진로를 결정하지 못해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고 나니 조금은 안심이 되고, 작가님도 꿈이 없었다고 하니 저도 위로가 되어요. 그래도 책도 많이 쓰시고, 지금도 글 쓰시니까 꼭 지금 찾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뭐든 일찍 시작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법은 없다. 10대 시절의 꿈이나 목표를 꼭 이룬 사람이 오히려 성취 이후 불안해 할 수 있다. 방황해본 적 없어서 혹은 다른 길을 가보지 않아서... 오히려 은기처럼 불안하고 방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옆에 있는 재혁이에게 “너도 꿈이나 되고 싶은 거 없지?” 라고 했더니, “응 나도 없어” 라고 한 마디 거든다.
수원에서 시민기자 활동하면서 지역사회에 관심 갖게 되고, 책을 쓰면서 여러 가지 경험들을 다 많이 하게 되고, 칠보산 자유학교에 재혁이 보내면서 또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이런 것들이 다 글의 소재이다. 기회가 된다면 은기의 이야기 뿐 아니라 칠보산 자유학교 교사, 학생, 부모의 인터뷰, 학교 수업의 모습, 밥 먹고 생활하는 이야기 등을 쓴 칠보산자유학교의 책을 나도 써 보고 싶다. 역시 만남은 새로운 배움이다. 나도 은기에게 영감을 얻고 배우게 되었다.
재혁어머님이 은기의 좋은 선생님이 돼 주셨네요.
작가님 글이라 그런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말씀처럼 진짜로 은기가 자유학교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를 쓰면 재밌을 것 같아요. 벌써 기대돼요!!
은기와 소중한 시간 나누셨네요^^
김학민선생님과 재서엄마가 준비하고 계신 우리학교 출판사에서 은기책이 나온다면 와~~ 정말 감동적일것 같아요^^
은기를 여러해 알아왔지만 이렇게 긴 대화를 나눈적이 있었던가 싶네요. 은기가 말표현이 좋다는건 생각해왔었는데 역시 글쓰기에 관심이 있군요. 은기가까이에서 재혁엄마가 계셔주셔서 은기가 글쓰기에 편하게 다가갈수 있는 계기가 하나의 되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음 다 해서 만나주셨네요.
은기에게 물어보니, 좋은 시간이었다고 했어요. 어머님 글을 읽어보니, 정말 그랬었군요.
앞으로도 종종 조언이 필요할 때, 지금처럼 마음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좋은 어른들이 옆에만 있는 것으로 성장하더라고요.
감사해요!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참 복된일 같아요^^
참 흐믓한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낸것 같아 글을 읽는 저도 가슴벅차 오르는듯 합니다.
우리 학교의 최고학년인 우리 5학년 학생들은 허허벌판에서 그 어린나이에서 부터 뭐든 처음 할수 밖에 없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이제 5학년이 되어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첫 졸업생으로서 기대가 큰 마음을 먹다가도 그런마음이 죄스러울때가 있을정도로 저는 5학년 아이들에게 빚을 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졸업생들에게 이런 좋은 어른들과의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고 다행이 교육과정에 선생님들께서 잘 녹여주어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과정이 우리학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다른학교에서 벤치마크하러오는 그런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재혁엄마있어서 든든.
아마 재혁이가 엄마가 자랑스러웠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