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농적 삶 9일차

작성자
kurory
작성일
2017-10-24 21:30
조회
1379
9일차 시작

오늘로 농적 삶 9일차가 됐습니다. 오누이 예절관에서 처음 맞이한 아침입니다.

마을회관도 보일러가 있지만 중간에 잠깐 작동을 멈춰도 냉기가 올라오는데 예절관은 중간에 멈춰있어도 따뜻함이 남아있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오전 농사 일정을 기다렸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체조를 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추워서 하우스 안 밭과 밭 사이에 서서 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하다가 옆으로 쓰러지거나 쌈채소를 밟으면 당연히 큰일이 나죠.

예전 같으면 고작 쌈채소 몇 개라고 할 수도 있지만 한 장씩 정성들여 따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밭 사이에서 체조, 준서와 저는 입구 쪽에 섰습니다.

 

엽서

학생들은 협업 농장에서 쌈채소 수확을 하는 동안 저는 설거지를 마저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감기 기운이 완전히 떨어진 게 아니라서 잠깐 누워있다가 엽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엽서인가 하면, 학생들과 함께 협업 농장 담당자 분들께 감사 인사로 드리는 엽서입니다. 학생들에게 언급은 해놓았지만 아직 실질적인 작업은 시작이 안 됐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하나를 만들어보고 학생들과 공유를 하자 했습니다. 게스트하우스와 마찬가지로 고마움을 표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것 같습니다.

오후일정

오늘 오전에 학생들은 잠깐 쌈채소 수확을 하고 홍성유기농영농조합으로 가기로 일정이 잡혔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갔습니다. 자료에서만 본 홍성유기농영농조합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습니다. 트럭 뒤 짐칸에 밭일 할 때 쓰는 깔개를 깔아놓고 앉았습니다. 협업농장에서 차로 3~5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과 노랗게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는 논 사이로 난 도로를 따라 시원하게 바람을 맞으며 달렸습니다.



규빈, 신났음



은기, 신났음

 

홍성유기농영농조합

도착을 하고 나니 정면으로 큰 창고가 보입니다. 왼쪽으로는 2층짜리 조립식 건물이 서 있습니다. 모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안에서 어떤 한 분이 나오셔서 저희를 모으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해주십니다.저희가 간 곳은 영농조합에서 유통을 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근처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들을 모아서 보관하고, 포장하고, 납품하는 등의 유통을 진행합니다. 학교 급식으로도 보내지고, 익숙한 두레 생협으로도 보내집니다. 저희가 협업농장에서 딴 쌈채소들도 이곳으로 와서 포장이 됩니다. 이렇게 와서 보니 생각이 좀 더 확장됩니다. 열심히 심고, 관리하고, 재배해서 생산한 농산물들이 이렇게 중간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쌈채소만 따다가 갔다면 그 그림을 모르고 갈 뻔했는데 중간 유통 과정까지 참여하면서 농산물 수확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양파

저희가 오늘 홍성유기농영농조합에서 할 일은 양파 포장입니다. 협업농장에서 같이 나오신 김현주 선생님과 규빈, 지수, 은기, 준서가 한 팀이 되어 양파를 포장하게 됐습니다. 경빈은 사무실 쪽으로 들어가서 쌈채소 포장을 했습니다. 양파는 6월 경 모든 수확이 끝납니다. 수확이 끝난 양파는 이곳 창고로 보내져서 저온 저장됩니다. 그렇게 보관되던 양파를 수요가 있을 때 창고 밖으로 꺼내 포장합니다. 저는 보통 마트에서 양파를 살 때 양파가 사계절 없는 때가 없어서 계속 생산이 되는 건 줄로만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양파 수확은 1년 한 번이고 저장되다가 출고가 된다는 건 생각도 못했습니다.

양파 포장

저희는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과정은 이렇습니다. 한 명이 양파를 1kg에 맞춰 무게를 답니다. 1kg만큼의 양파를 다음 사람이 넘겨받으면 양파를 빨간 망에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포장이 되면 다음 사람이 받아서 한쪽에 차근차근 쌓습니다. 그렇게 양파가 어느 정도 쌓이면 생산자 이름표와 바코드 스티커를 끈에 붙여 다른 박스에 차곡차곡 넣습니다. 여기까지 하면 저희의 임무는 끝납니다.

처음에는 손에 안 익어서 속도가 쉽게 나질 않았습니다. 무게를 달 때는 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합니다. 작은 양파를 큰 양파로 바꿨다가 넣었다가 빼냈다가 합니다. 그걸 1kg에 맞추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빨간 망에 양파를 넣는 것도 생각만큼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7~8개 정도 되는 양파를 넣어야 하는데 처음 할 때는 양파가 다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아주머님께서 교차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고 시범을 보여주십니다. 맨 밑에 두개가 들어가면 그 위로 또 두 개가 들어가는데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게 순서대로 넣으면 딱 1kg 들어갈만큼 늘어납니다. 이 빨간 망은 누가 발명했을까 싶었습니다. 지수와 은기가 처음에 무게를 달고, 저와 규빈, 현주 선생님은 포장을 합니다. 준서는 포장이 된 양파망을 받아서 한쪽에 정리합니다. 처음에는 속도가 나지를 않으니 워낙 하시던 아주머님들께서는 이래서 오늘 양을 다 채울 수 있을까 하신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 할머님들께 이 일을 맡겨드리면 망 하나 포장에 100원씩 드리는데 하루에 8만원을 벌어가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800개를 채워야 합니다. 할머님 혼자서 8만원을 벌어가실 수 있는 이 일이, 저희 초보자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바쁨



포장된 양파를 옮기는 준서



쌈채소 포장 중인 경빈



양파들



생산자 표시 스티커까지 붙이면 이 카트에 싣습니다.



바쁜 현장



끝! 후련함



인증샷



영농조합 분들이 고생했다고 챙겨주신 유기농 소시지와 유기농 사과

 

오전 내내 포장을 하다가 생미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습니다. 짜장밥과 탕수육이 주메뉴였는데 아이들은 이미 생미식당의 팬이 되어 있었습니다. 갈 때마다 기대를 하고 가는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한 번 더 먹었을 텐데 후딱 먹고 다시 돌아가야 해서 아쉬워들 했습니다. 다시 창고로 돌아가서 잠시 쉬다가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만족도 200% 생미식당

이제는 손에 좀 익었습니다. 하면서 이야기를 할 여유도 생겼습니다. 물론 초보들이다 보니 입을 놀릴 때는 손도 느려집니다. 그래도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할 때는 노래를 듣든 노래를 하든 이야기를 하든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지루함이 가장 큰 적인 것 같습니다. 협업농장의 김현주 선생님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학생들도 서로 얘기하고, 장난치고, 떠들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4시 20분쯤에 끝나는데 20분 남은 상황에서 양파가 두 상자 남았습니다. 10분 안에 한 상자씩 해서 끝을 내버려야 합니다. 이 마지막 20~30분 정도를 모두 상당히 전투적으로 임했는데 끝이 보이고, 끝장을 보자 마음을 먹으니 속도가 붙습니다. 양파 한 상자가 비워지기 무섭게 새로운 상자를 넣을 수 있도록 준비도 하고, 스티커도 붙여서 바로 내보낼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마지막 한 상자까지 다 끝내고 나니 40시 20분쯤이 됐습니다. 양파 껍질들을 전부 쓸어담고, 흙먼지들도 빗자루로 청소합니다. 그렇게 청소까지 끝내고 나니 깔끔합니다. 속도 시원합니다. 그렇게 끝낼 때가 되니, 저희에게 먹으라고 사과 몇 봉지와 직접 생산된 유기농 소시지를 주셨습니다. 오늘 수고했다는 의미로 주신 건데 사과와 소시지에 입들이 귀에 걸립니다. 희한하게도 먹을 게 계속 생깁니다. 뿌듯함으로 인증 사진 몇 장을 찍고 바로 농장으로 향했습니다. 저녁에 밝맑 도서관에서 강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4시 55분 버스를 타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기다림

 

배움, 지역의 이해

바쁘게 밝맑 도서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약 5시 20분쯤 도서관 앞에 도착했는데 30분이면 강의가 시작됩니다. 7시에 끝날 예정이고 7시 55분 마지막 버스를 타고 농장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저녁 먹을 시간이 상당히 늦게 됩니다. 저는 생협 빵집으로 가서 간단히 요기할 만한 빵을 사들고 아이들을 모아 도서관에 들어섰습니다. 도서관에는 이미 강의를 듣는 다른 분들과 오늘 강의를 해주실 박 완 선생님께서 앉아계셨습니다. 박 완 선생님은 1학기에 학생들과 함께 와서 뵌 적이 있습니다. 처음이었지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신 것이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주제는 지역의 이해입니다. 홍성이나 홍동, 장곡 지역에 대한 뭔가를 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에게 필기를 할 수 있도록 워크북을 나눠주고 저도 펜을 잡아 들었습니다. 간단한 인사 후에 시작된 것이 덴마크 이야기였습니다. 덴마크 이야기라는 자료가 모두에게 나눠졌고 돌아가면서 읽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씩 소리내어 내용을 읽었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라는 개신교 사상가가 쓴 글이었는데 덴마크가 외적으로는 전쟁에 패하고도 내적으로 어떻게 채워 다시 강소국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덴마크의 공병장교였던 달가스라는 사람이 덴마크의 척박한 토지에 나무를 심고 심어서 결국은 숲을 만들어냈고 그 땅을 기반으로 하여 덴마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내용에 성서 말씀과 신에 대한 믿음이 함께 들어있었습니다. 박 완 선생님의 말씀대로 아주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이야기와 그에 담긴 뜻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리내어 읽기가 모두 끝난 후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박완 선생님은 내용을 다시 한 번 풀어서 설명을 해주시기도 하고, 묻고 답하기도 하시면서 저희에게 필요한 내용들을 정리해주셨습니다. 저희는 모든 강의가 끝난 후에 바로 옆 유아 도서실로 가서 강의 내용에 대한 나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규빈

제가 덴마크 이야기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은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을 수 있다'와 '칼로 잃은 것을 괭이로 되찾는다'입니다. 사상이 아니라 나라의 문제를 헤쳐나갈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내용도 인상에 남습니다. 울창한 숲도 인간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말씀도 좋았습니다. 특히 박 완 선생님께서 놀이가 왜 생겼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신 게 기억에 남는데 '놀이는 인간이 죽음을 잊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중학생 때 죽음을 떠올리며 무서움, 공포, 불안을 느낄 때 다른 것을 손에 쥐었던 것이 경험이 생각났습니다.

(지수는 이 얘기를 듣고 규빈에게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불교에는 윤회 사상이 있으니 이걸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으로요. 규빈은 그 윤회 사상이 싫다고 대답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전생이 있다면 전생의 기억을 전혀 못하는 것처럼, 새로 태어날 때마다 기억들을 잃는 게 더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꽤 깊이있는 몇 마디 대화가 오갔습니다. 이후 계속 시간을 두고 이야기할 만하겠다 하고 일단 마무리했습니다.)

경빈

공부의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말이나 생각만이 아니라 실력도 키우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 신념의 실천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제가 당구를 시작하면서 학교를 놓지 않은 이유가 그거였어요. 힘, 실력을 갖게 되면 좋은 곳에 쓰고 싶었거든요. 최소한 어떤 한 사람의 생각이라도 바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때 공부하라는 말씀에 다양한 이야기를 곁들여서 말씀하시니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은기

이 글에서 동의가 되는 부분도 있고 안 되는 부분도 있어요. 우리는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 인상에 남았고 전쟁에서 패망한 슬픔 속에서도 정신력을 갖고 살아가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말에 동의가 됐습니다. 하지만 너무 종교적으로 연결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가스가 덴마크를 개혁한 것이 종교적 정신 때문인 것보다는 애국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신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능력도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동의가 됐습니다. 저는 아까 규빈이가 이야기한 것과는 반대로 어르신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사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 전두환을 거치면서 굳어진 사상이 이명박, 박근혜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지하는 것은 사상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질문을 듣고 일본 만화 중에서 '맨발의 겐'이 떠올랐는데 일본 제국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모습이 맨발의 겐에 나오는 주인공의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수

저는 박완 선생님을 다시 한 번 봬서 좋았습니다. 말만 잘 하는 사람에게 일을 시킨다면 잘 못한다고 하신 말씀이 있는데 옛날 우리 학교에서 무지개 학교 모 선생님이 오셔서 강의를 하셨을 때, 대안 학교 학생들이 사회로 나가면 보이는 특징들이 이런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그때 그 이야기, 그리고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대안 학교 학생으로써 어떻게 그 두 가지를 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습니다. 또한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디자인 철학도 이와 비슷합니다. 말만 잘 한다는 것은 외부로 보이는 화려한 스타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실제로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포함되어 있는 기능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즉 형태가 기능을 따라야 한다는 게 제 디자인 철학입니다. 덴마크의 토지 개간에 대한 철학이 이곳 홍성에 아주 많이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읽다 보니 덴마크 내부의 토지 개간 철학은 꼭 기독교에만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을 강요하기보다는 종교는 붕 떠 있는 이상이 아니라 사실은 실용주의에 꼭 필요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와 같고,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과 같다."

박 완 선생님은 덴마크 이야기 후에 이어서 젊을 때 공부를 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료의 내용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강의에서 가장 어린 저희 학생들이 있는 것을 보고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말씀을 하신 게 아닐까 느꼈습니다. 선생님 당신 스스로도 지금은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는데 젊을 때는 그 많은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수첩을 보지 않아도 기억할 정도로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직전, 학생들 얼굴을 보시다가 "어디서 본 것 같은데..."라고 하셔서 1학기 때 찾아뵈었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 이어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에 맞춰 젊은 시절, 10대와 20대에 쌓인 지식들로 이후를 계속 살아가게 된다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경험에서 우러져 나오는 말씀이시니 그만큼 설득력이 컸고, 공감도 많이 갔습니다. 이걸 학생들도 함께 느낀 것 같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함께 이런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질문을 드렸던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덴마크 이야기 내용 중에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전 일본 국토의 10분의 1...'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고 당시가 일제 시대임을 알았고 일제 시대라면 (도덕적인 잣대를 일단 내려놓더라도) 일본이 상당히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 중 하나인 때일 텐데 왜 그런 시기에 이런 덴마크 이야기가 나오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시기 우치무라 간조는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것을 무척 반겼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나라의 바른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러일 전쟁 때는 이러한 국가 노선에 대해 반대를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일본 천황에게 절을 하는 것도 거부하여 상당한 고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이런 덴마크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일본이 밖으로 계속 뻗어나가는 것을 경계하고 그 부유함과 강대함을 내부에서 찾자는 의미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은 지식층이 상당히 많았는데, 간조가 이런 제자들만 콕 찝어 거둔 것은 아니지만 후일 보니 그렇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으며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강의 제목은 지역의 이해였으나, 학생들과 제 개인에게도 삶의 자세나 공부에 대한 태도 등을 다시 한 번 잡아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눔을 마치고 바쁘게 도서관을 나섰습니다. 저희가 나올 때까지도 박 완 선생님과 다른 몇 분들은 모임을 계속하고 계셨습니다. 밝맑 도서관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요. 도서관이 있다고 해도 이런 모임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도서관은 이 지역에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일까요. 우리 학교 숲교실 뒷편에 책들이 꽂힌 공간을 떠올려 봅니다.

다시 농장으로

7시 55분. 장곡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입니다. 이 버스를 놓치면 1시간을 걷거나 택시를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20분 전부터 정거장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옆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을 보니 재미있습니다. 저 때가 저런 때였지 싶습니다. 버스가 왔습니다. 막차라 그런지 적막합니다. 버스 안에 등은 환하게 켜져 있지만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이들을 태우고 어둠이 깔린 논밭과 농가들 사이로 달려서 그런지 경건한 느낌마저 듭니다.

바로 조리동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저녁 메뉴는 라면이었습니다. 준서가 끓이겠다고 해서 같이 끓이기로 했습니다. 지수가 먼저 물을 올렸고 준서와 저는 라면 봉지와 스프를 뜯어두었습니다. 물이 끓고 면을 넣습니다. 스프를 넣으며 간을 보다가 다 털어넣었는데 약간 싱겁지만 먹을만은 했습니다. 라면을 먹고 있는데 협업 농장에서 일하시는 분이 들어오셔서 '이쪽에 있는 간식거리들 먹어도 된다'고 하십니다. 초코바와 귤, 빵이었는데 엊그제 모두 눈독을 들였던 것입니다. 제가 우리 꺼 아니라고 단칼에 그 눈길들을 잘라버렸는데 알고 보니, 저희 먹으라고 쪽지를 붙여두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쪽지는 사라져 있었고 저희는 그림의 떡을 보는 것마냥 침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먹을 게 끊이지를 않습니다.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스프 뜯는 준서



면 투입 완료

 

하루 닫기

바로 하루 닫기를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9시가 다 돼서 바로 해야 합니다. 농적 삶 기간 동안 하루 닫기는 빼놓지 않았습니다. 일기와 하루 닫기는 생략할 수가 없는 내용이었고, 강의를 들은 후에 나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닫기를 하지 않으면 그 하루는 버린 하루가 됩니다. 나눔을 하지 않으면 그 강의는 버린 강의가 됩니다. 전반부에 했던 아침 명상이나 침묵과 독서도 마찬가지로 나눔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주 소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리와 나눔은 힘과 실력을 더 크게 키워줍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알게 됩니다. 6명이 정리하고 나누면 그 힘은 6배가 됩니다. 느티나무 책방 바닥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저희가 나누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닙니다. 저희 6명 각자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하는 것이며 저희의 일생이 함께 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인연이 평생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로 좋은 변화를 끌어줄 수 있는 시간을 보낸다면 인연이 평생 가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하루 닫기를 두 번만 하면 저희 농적 삶 일정은 끝이 납니다. 이 농적 삶 일정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무언가 변화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루하루 변화하는 모습을 함께 나눈 후에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물론 자는 시간을 정해둬도 킥킥 거리다가 시간이 넘어서 잠이 듭니다. 저도 그냥 모른 척합니다. '이때 아니면 언제'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전체 2

  • 2017-10-25 20:09
    지수가 이야기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행동없는 사색은 공허하고 사색없는 행동은 맹목적이라는 말도 생각나고 (누가 이야기 했는지 모르겠는데 하이데거 인가??)
    그리고 도란 고(고통)와 낙(즐거움)이라는 두 극단을 여의고 중도를 행하는 자만이 도를 얹는다고 말한 석가모니불의 말씀도 생각나는 구절입니다~
    공허하지 않게 행동하면서 그러나 맹목적이지 않게 주변을 돌아보며^^

  • 2017-10-26 16:40
    하루 닫기를 하지 않으면 그 하루는 버린 하루가 됩니다. 나눔을 하지 않으면 그 강의는 버린 강의가 됩니다.
    정리와 나눔은 힘과 실력을 더 크게 키워줍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인만큼 알게 됩니다.

    공감이 확~ 되는 말씀입니다.
    모두들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 지켜보는 저도 뿌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