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농적 삶 11일차

작성자
kurory
작성일
2017-10-26 23:23
조회
1167
알람이 울립니다. 오늘 하루가 또 시작됐습니다. 이 닦고 세수를 한 후에 옷을 갈아입고 조리동으로 나갔습니다. 오늘 누룽지를 끓여먹으려고 어제 미리 누룽지를 만들어뒀습니다. 오늘 아침 식사는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 후에 숙소로 잠깐 돌아갔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또 다른 학생들이 한 줄로 들어오는 게 보입니다. 나가면서 서로 인사를 했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부천에서 온 산어린이 학교 학생들과 선생님입니다. 저는 숙소 쪽으로 간 김에 기념으로 숙소 사진을 몇 장 찍었습니다. 하늘도 함께 찍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게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내부와 외부는 싹 단장이 됐고 기본 골격은 400년이 됐다.



워낙 있던 고택 앞에 지어진 새 건물, 주인 할머니가 맨 왼쪽 방에 거주하신다.



하늘



경빈이가 묵던 작은 방 입구

오늘 오전에는 행복 농장에서 바질 수확이 있습니다. 규빈, 준서, 지수, 경빈, 은기 다섯 명은 은정 선생님과 함께 농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오누이 강당 뒤편에 앉아서 어제 학생들이 만든 엽서에 더해 몇 가지 엽서를 더 만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엽서를 만들고 편지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모든 엽서를 넣을 수 있도록 작은 봉투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들을 다 하고 나니 점심 시간이 됩니다.



대안학교를 졸업한 타 학교 선배에게 궁금한 내용들 정리



엽서를 넣을 봉투



감사를 표하기 위해 추가로 만든 엽서들

오후 2시부터는 강의 일정이 있습니다. 워낙에는 저녁 5시 정도 일정이었는데 어제 이야기할 때는 3시였다가 오늘은 또 2시로 당겨집니다. 계획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유동적인 것이 협업 농장의 특징입니다. 또 다시 안정과 불안정에 대한 내용이 떠오릅니다. 평소 같으면 당일 취소되고 옮겨지는 것에 기분이 안 좋았을 텐데 이곳의 흐름에 익숙해지니 이런 시간 변동도 별로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강의

강의는 4시에 시작했고 저녁 식사는 대략 6시 20분쯤 했습니다. 즉 강의부터 저녁 식사까지 약 4시간 20분이 있는데 그 중 20분은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2시간씩 4시간을 꼬박 앉아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마을경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열심히 받아적고 집중해서 듣던 저조차 지루하고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저도 이런데 학생들은 오죽할까요. 그래도 학생 5명 모두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걸 제외하고 모두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나중에 같이 수업에 참여하신 이은정 선생님이 애들 대단하다고 하시는데 괜히 한 번 더 뿌듯했습니다. 지루하고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는 내용을 계속 듣고 앉아있는 게 그리 추천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끝까지 인내하고 앉아있었던 건 참 대단하다 싶습니다. 이렇게 힘든 수업이었지만 소득도 있습니다. <마을 경영>에 대한 책을 한 권씩 받았고 지수, 규빈, 저는 퀴즈를 맞추고 상품도 받았습니다. 지수는 오늘 오전에 바질 수확을 했는데 상품은 바질 화분이 나왔습니다. 상품을 받아서 좋기는 한데 바질 화분이라 아쉬워합니다. 규빈은 뚜껑이 있는 머그잔, 저는 길쭉한 물병을 받았습니다. 강의 수강 후 당연히 나눔을 했습니다. 지루하고 힘든 건 일단 뒤로 밀어두고 그래도 듣고 기억에 남고 나누고 싶은 내용들이 있는지 함께 이야기하고 정리했습니다.



질문에 답변 중인 지수



질문에 답변 중인 경빈



생각지도 못하게 참여하게 된 세미나



세미나 실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강의 나눔



규빈

딱 이 생각 밖에 남지 않았어요. 농민은 군인이자 의사이다. 국가의 식량을 지키는 군인이자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의사이다. 농민이 없어지면 식량이 없어지고 재배를 못하게 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나 패스트푸드, 농약을 친 해외 농산물이 들어오면 식량 주권이 없어집니다. 그렇게 약을 치거나 한 안 좋은 음식 때문에 몸이 약해지거나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4차 산업 혁명으로 의사, 변호사 같은 직업은 없어진다는 말은 많지만 자연에 관한 직업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인상에 남았습니다.

보충 하나 할게요. 직업을 물어봤잖아요. 장래 희망. 아빠가 많이 이야기했거든요.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를 생각해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가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냐를 생각하거든요. 선생님은 뭔가 성취감이 아니라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거든요. 이 일을 무엇을 통해 이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끝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사실 문제는 안 되는 거죠. 반드시 큰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경빈

저는 강의 때, 일단 5시까지 든 생각으로 이야기를 할게요. 농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무리 잘난 사람도 컴퓨터를 씹어 먹거나 그러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연만큼 위대한 교사는 없고 자연과 함께 하는 농부는 위대한 교사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 들으면서 농촌을 크게 생각하시고 중요하게 여기는 분이라 생각했어요. 강의 듣는 분들이 농촌 분들이 대부분이시겠지만, 강의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촌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하는 그런 강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고 저한테 꿈이 뭐냐고 하셔서 당구선수라고 했더니 꿈을 물어보면 직업이 아닌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셔서 조금 기분이 나빴어요. 왜냐하면 점점 꿈이 곧 직업이 되어가는 것은 안타깝지만, 직업 자체가 꿈인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하나를 깊게 파지 못하는 성격이라 당구선수가 된다는 것이 한 분야를 꾸준히 파서 전문가가 되었다는 것이라서 저한테는 한계를 넘어선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구선수라는 직업이 꿈이기도 하거든요.

농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아빠가 명예를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고 항상 말씀하시던 게 생각났어요. 요즘은 자기 이익, 돈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라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바보 취급을 받잖아요. 명예가 중요한 사회가 된다면 이웃을 신경 쓰게 되고, 더 좋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수

전반 부분은 좋았는데 후반 부분은 많이 늘어졌어요. 기억에 남는 말은 ‘음식으로도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 이건 저희 가족의 기본 철학입니다. 치킨보다 백숙이 더 건강에 좋다는 얘기도 인상 깊었습니다. 농업인이 군인 역할을 한다는 말, 우리 마을의 문화를 지킬 수 있는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와 자연에 가까운 직업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1인 2역을 잘 하시더라고요. 인상이 깊었어요. 이 책에서도 이런 식의 대화가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이 선생님이 이 책을 쓸 때 여러 마을을 돌아다녀보면서 쓰셨다고 하시는데, 마을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게 좀 아쉬웠어요. 그리고 분석을 해놓으신 건 좋은데 제 생각에는 차라리 여러 가지 마을 말고 괜찮은 4개의 마을을 골라서 좋은 사례들에 대해서 자세히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여러 분이 말씀해주셨는데 ‘리더 양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셨는데 그건 좀 별로였어요.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는 건 좋지만 과도한 개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을 만들기 지원 센터에서 해주는 건 비용 지원만 해주면 될 것 같은데 과도한 개입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도 마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은기

일단 저는 지수 얘기처럼 초반부는 좋았어요. 후반에 보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돈이 들어오면 약이 아닌 돈이 된다는 이야기나 농업이라는 것이 직업으로 보면 의사와 같다는 이야기까지는 괜찮았는데 지금 보면, 강의하신 분보다 오신 분들이 더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그게 아산에서 오신 분이 직과 업에 대해서 저희 진로 수업과 맞게 잘 설명해주신 것 같아요. 업이라는 것이 일이고, 직이라는 것이 정신적이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희 철학과 맞는 것 같아요. 강의해주신 선생님이 마을 사업 이야기를 주로 하셨는데, 사업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초점을 맞추지 말고 마을 사업이라는 것이 하나의 수단일 뿐이라고 아산에서 오신 분이 말씀하셨거든요. 그리고 계속 지도자 육성을 이야기했는데 지도자 양성보다는 주민 육성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공감이 됐습니다. 그 이유는 리더를 만들어서 리더가 끌어가는 것보다는 저희 학교처럼 공동체 방식으로 협업해서 가면 민주적 방식도 자연스럽게 잡히기 때문입니다. 또 네트워크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그건 동의가 좀 안 되는데 제가 생각하는 네트워크는 생미 밥상이나 조합들 간의 연계 같은 게 네트워크라고 생각하거든요. 말씀하신 예는 농촌 마을의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돈을 중심으로 얘기하는 거 같았어요. 그리고 리더십 역량 강화라는 표를 봤는데 기가 찼어요. 농촌의 리더십이라면 농촌에 걸맞는 역량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이건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이건 농촌을 도시화시키는 식 같았어요. 농촌을 무한경쟁의 장으로 보는 것 같아서 좀 그랬고 도시의 패러다임을 적용하는 듯했습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하나의 리더가 하는 게 아니라 공론적인 방법으로 협업해 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규빈이와 경빈이의 이야기 중에서 꿈을 묻는 부분에 대해서 저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제 머릿속에는 하나의 공식이 잡혀있습니다. 직업은 더 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강의 때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미국 최고의 빵집을 차리겠다고 한 소년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소년은 결국 미국 최고의 빵집을 열고는 일정 시간이 되면 가게 문을 모두 닫고 각 가게에서 가장 가까운 양로원이나 고아원 등에 가서 빵을 나눠주고 돕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직업은 더 큰 목표를 위한 수단이며 때문에 목표가 정해져있으면 좋다는 게 저의 생각이었고 일반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규빈이가 얘기한 자전거 같은 경우만 하더라도, 꼭 무슨 큰 목표 때문에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큰 목표가 있다면 원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큰 목표가 정해지고 직업을 생각해 보는 게 전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큰 목표가 없어도 문제는 안됩니다. 그냥 재미로 하다가도 목표가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작은 목표들을 이루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면, 그리고 그걸로 생활도 가능하다면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저 스스로도 너무 이분법적인 사고에 빠져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드시 크고 이상적인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부지불식간에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작은 목표들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재미가 있다면요.

뒷마무리

정신이 없습니다. 강의 나눔도 해야 하고 내일 일정 공유도 해야 합니다. 내일 일정은 이렇습니다. 오늘 자기 전에 일단 최소한으로 정리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고 자야 하고, 내일 아침에 똑같이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작업이 약간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후에 협업 농장 가족들과 인사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청소와 정리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10시가 넘을 것 같은데 그때 우리는 가방을 짊어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야 합니다. 광천역에 도착한 후에도 일정은 계속 됩니다. 후반부 일정을 먼저 글로 정리하고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함께 나눔을 진행합니다. 여기까지 해야 모든 일정이 끝납니다.

주말 동안은 지금까지 쓴 일기나 제가 누리집에 올린 글들을 참고해서 전체 일정에 대한 후기를 쓰고 다음 주 월요일까지 제출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하면 진짜 끝이 납니다. 현재 시간은 10월 27일 00시 03분입니다. 오늘 내용을 끝까지 올리고 자려고 기를 쓰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장 내일 나가는 날이라 오늘 내용 정리를 해놓고 싶었습니다. 애들은 먼저 잠이 들었을 겁니다.

학생들도 마무리를 하겠지만 저 스스로도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이곳에서 배운 것과 생각한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단순히 농사 짓는 것만 생각하다가 이렇게 큰 선물을 받게 될줄 몰랐습니다. 제가 배운 것과 생각한 것들을 그저 제 머릿속에 담아두기만 하고 그 많은 메모와 글들을 보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처럼 달란트를 땅에 묻어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배운 것들을 꽁꽁 싸매어 학교로 갖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여기서 배운 농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써야겠습니다.

눈은 무거운데 잠은 안 옵니다.

기쁘면서도 아쉽습니다.

농장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농적 삶 이야기 기록도 끝이 나기 시작합니다.
전체 3

  • 2017-10-27 10:56

    매일 올려주시니 매일 기다려지네요^^ 며질동안 4학년 여행글 읽느라 즐거웠는데 저도 아쉽네요.
    글이란게 참 속절없이 투명한 것이어서 선생님 글에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어요. 마지막 몸 건강하게 잘
    챙기시고 아이들과 수원에서 만나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 2017-10-27 15:09

    이번 여행일기와 아이들 글 조금 다듬어 작은 책자 내어보았으면해요 ^^
    드디어 오늘 아들을 보게되네요!!


  • 2017-10-28 11:59

    우리가 우리아이들 나이때 교육노동자에 의한 죽은 교육과 자율이란
    이름의 감옥인 야간자율학습에 내몰려 아무생각없이 대학진학을 결정하고 직업 직장을 가진탓에 어쩌면 우리가 우리아이들에게 그들의 미래에 너무 큰 의미와 기준을 부여하는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각자가 다 다르듯이 미래를 헤쳐나가는 방식도 다 다를 것입니다.
    아이들 미래준비에 어른들의 역할을 좀더 조심스럽게 섬세하게 연구해 봐야 겠습니다.
    모두들 너무 자랑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