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농적 삶 8일차

작성자
kurory
작성일
2017-10-23 21:12
조회
1248
늦잠

어제부터 골골거리더니 늦잠을 잤습니다. 5시 반에는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해야 하는데 알람을 끄고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뜨니 6시입니다. 몸살 기운이 몸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경빈, 지수가 일어나서 씻고는 나갈 채비를 합니다. 저도 정신을 다시 챙기고 같이 길을 나섰습니다. 다행히 어제 아침 식사거리를 준비해 둬서 많이 준비할 건 없었습니다. 오기 전에 아침 식사거리 걱정을 좀 했었는데 와서 보니 뭔가 계속 먹을거리가 생깁니다.

시작

7시. 오늘도 원으로 둘러서서 체조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저번 주와 주말에 있던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저희만 남았습니다. 요 며칠은 저희 칠보산 학생들만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 다시 '불안정'에 대해서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은 행복농장에서 허브를 수확해야 합니다. 저와 준서는 화단 앞도 정리해야 합니다. 지난 안개낀 아침 건넜던 다리를 건너 행복농장으로 갔습니다.



행복으로 가는 아침



멀리서 벽돌공장 굴뚝도 일찍부터 김을 내뿜습니다.



저번에 못 봤던 예쁜 선반이 생겼습니다. 예산에 있는 덕산인가 하는 곳에 사시는 목수 분께서 작업을 해주셨다고 하는데 이음새가 매끈한 것에 감탄했습니다.

허브 재배 그리고 졸업여행

오늘은 할당량이 있습니다. 할당량을 채워야 끝낼 수가 있는데 저희가 딴 허브가 바로 납품이 됩니다. 잠깐 대기하다가 비닐과 쪽가위를 하나씩 들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첫 번째 재배 품목은 애플민트입니다. 쪽가위로 윗 부분을 잘라내어 비닐에 담으면 되는데 벌레를 많이 먹었거나 잎이 누렇게 변색된 것들은 따면 안 됩니다. 경빈이는 계속 허브만 따면 좋겠다고 합니다. 저도 옆에 앉고 준서도 옆에 앉아서 조심조심 가위질을 했습니다. 채우면서 경빈이와 졸업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졸업여행을 여기로 오는 건 어떠냐는 농담으로 시작해서 해외에 이런 곳이 있다면 가볼 만하지 않겠는가 물었습니다. 졸업 여행은 아무래도 관광  가서 사진 찍어오는 게 목적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여행 시간에 졸업 여행 장소로 유럽, 미국, 호주, 일본, 인도 등이 나왔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바이칼 호수 이야기도 오고 가다가 항공편이 없어질 예정이라 빠지기도 했는데 그 이상 진전은 안 된 상황입니다. 저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지내고 배우다 보니, 어떤 졸업 여행이면 좋겠다는 청사진이 조금씩 잡혔습니다. 학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런 환경과 공간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 해외로 나가느니만큼 그곳의 경관이나 건물들도 보는 시간이 있겠지만 졸업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음의 준비이니, 그런 의미를 담은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해외에 이런 곳,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일전에 제가 대안교육 연대에서 주관한 인도 오로빌 공동체 아비람 로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막화되어가는 땅에 나무를 심고 또 심고, 전 세계에서 봉사자들이 와서 같이 심고 심어 지금은 숲이 된 곳 안에 오로빌 공동체가 있습니다. 여기라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이 들어 제안을 해놓기는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생각하고 고민하고 나누는 시간은 필요하다는 생각이며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생각과 나눔이 현재 농적 삶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번 농적 삶이 학생들이 졸업여행의 외형과 내용을 잡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애플민트 재배 시작



준서, 포즈 잡길래 자연스럽게 하라고 했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했음



은기



지수와 규빈



경빈이 손



얼마나 땄나 무게 다는 중



준서의 풀 뽑기



할당량 채운 뒤 뿌듯함과 함께 인증샷



생미 식당을 가게 되면 나오는 미소



은기도 함께



침낭 안에서 쉬는 경빈, 감은 눈은 설정

일보 후퇴

준서하고 행복 농장 화단 앞을 정리하다가 일보 후퇴했습니다. 어제 밤부터 차오르던 몸살 기운이 머리 끝까지 간 겁니다. 다행히 열은 안났지만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쉬 피로감을 느낍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잡초를 긁어내고 학생들 사진을 찍다가 아예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아버렸습니다. 목은 간지럽고, 코는 막히고, 기침은 나올까 말까 합니다. 그대로 눈을 감고 잠시 잠을 청했습니다. 저 말고도 몇 명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괜찮을까 싶었습니다.

점심 때 저번에 갔던 생미 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만둣국이 주 메뉴였는데 은기와 규빈은 소화제가 필요할 정도로 먹었습니다. 일일이 손으로 빗은 김치 만두를 사골 국물에 넣어 끓였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저도 한 그릇을 더 먹었습니다. 저는 오는 길에 보건소에 들렀습니다. 그곳에서 약을 받아서 농장에 들어오는대로 먹었는데 몸이 빨래줄에 널린 것처럼 축 늘어집니다. 약 기운인지, 몸살 기운인지 눈꺼풀이 내려갑니다. 점심 후 쉬는 시간이라 학생들은 마을회관에서 쉬는 시간을 갖고 저는 오누이 강당으로 가서 일지 정리를 위해 컴퓨터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강당 위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잠을 청했습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데 볕은 따뜻한 게 몸에서는 봄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다시 일보 전진

눈을 떠 보니 시간은 2시 20분쯤. 학생들은 2시 10분까지 모여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했으니 이제 막 작업 중일 겁니다. 몸을 일으켜서 강당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작업을 하기에는 아직 무리이니 일지를 정리하는 게 나았습니다. 밀렸던 내용을 정리하고 마무리하니 저녁 때가 다 됩니다. 학생들은 5시쯤 식사를 시작할 테니 최소한 4시 30분부터는 준비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밥을 올리고 감자, 양파, 당근, 햄을 썰었습니다. 오늘 메뉴는 카레입니다. 감자와 당근을 달달 볶다가 햄, 양파 순서로 다 부어넣고는 계속 볶았습니다. 카레 분말 두 봉지를 넣으니 모양이 그럴 듯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도록 학생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5시 30분에 끝나려나 생각하면서 냉장고를 열고 양배추 하나를 주섬주섬 꺼냈습니다. 엊그제 농장 매니저 분이 양배추가 남는다고 하나 주셨는데 반쪽은 양배추 쌈으로 찌고 반쪽은 채를 썰어 샐러드 재료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학생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았습니다. 이 정도로 늦게까지 안 오는 거라면 분명 작업이 길어진 것일 거고, 지친 얼굴로 들어올 것이 뻔하니 조리동 문을 열자마자 별 건 없어도 풍성한 밥상이구나 느끼게 해주는 게 좋겠다 싶어 남을 걸 알면서도 무리를 했습니다. 양배추쌈 소스까지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봤습니다.

6시가 다 되어 준서와 규빈이가 뛰어옵니다. 지친 얼굴이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지수, 경빈이 들어오고 또 조금 있다가 은기가 들어옵니다. 양배추쌈 소스가 완성 직전이고 아직 다 오지 않았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손을 바삐 놀렸습니다. 소스가 완성되고 밥솥을 통째로 빼서 상 위에 올려 밥을 펐습니다. 더운 김 빠질새라 뚜껑을 덮어둔 카레도 열어서 한 국자씩 올립니다. 고생들 했으니 많이 먹어야죠. 마침 저번 주 토요일 나래 이모님이라는 분이 생미 식당에서 챙겨주셨던 겉절이 김치가 있으니 카레와 궁합이 딱 맞습니다. 양배추쌈도 하나 올리고 소스도 놓습니다. 카레와 양배추쌈이 웬 말인가 싶긴 하나 눈으로만 먹어도 좋습니다.

낮에 보건소에서 타온 약이 효과가 있는 모양입니다.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몸살기가 약 기운 타고 조금씩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또 저녁 준비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몸이 회복되려고 애를 쓴 모양입니다. 지금도 목과 코는 아직 회복 전 상태지만 하루를 시작하고 보낼 만큼은 괜찮아진 것 같습니다.

휴식

저녁 식사 후 정리를 마치고 모두 마을 회관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 나섰습니다. 오늘부터는 오누이 예절관에서 4박을 하게 됩니다. 짐을 풀고 나니 7시 45분쯤이 됩니다. 아까 저녁 식사 때 오늘 작업 시간이 많이 늘어져서 휴식이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자유시간을 가질지 아니면 침묵과 독서 시간을 가질지 결정을 해서 알려달라고 하니 자유시간을 갖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하루를 마치며

내일은 화요일입니다. 오늘이 월요일이었는데 월요일인지 못 느꼈습니다. 일요일에 오전 작업을 해서인지, 아니면 365일 쉬지 않는 농장의 흐름이 몸에 약간 들어온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내일 오후에는 배움 시간이 있습니다. 풀무 학교 박 완 선생님의 강의인데 밝맑 도서관으로 나갑니다. 일정에 별 다른 변동이 없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다 보니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도 있지만 그 배움을 더 크게 키워주는 건 그 사이에 들어가 있는 좋은 분들의 강의라는 걸 느낀 까닭입니다. 400년된 고택을 이불 삼아 100년도 못 산 몸을 뉘입니다. 50년도 안 된 어린 생각들을 가만히 재우고 저도 눈을 감습니다.

 

덧붙이기

애플민트를 수확하며 이야기를 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담당 선생님에게 허브가 사시사철 모두 잘 자라는지 물었습니다. 바질은 온도와 습도에 약한데 애플민트는 추위에도 강한 편이라고 합니다. 마당 한 켠에 애플민트 미니 하우스를 만들어볼까 싶었습니다. 철사와 비닐로 간단하게 뚜껑처럼 만들어 겨울을 나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전체 2

  • 2017-10-24 10:08
    마지막 글이 좋아요 학교이름걸고 문고든 출판사든..꿈을 꿔보아요^^

  • 2017-10-25 09:04
    선생님. 돌아오시면 크게 몸살나실까 걱정되네요. 애들 시키고 살짝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