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농적 삶 7일차

작성자
kurory
작성일
2017-10-22 21:51
조회
1469
빨간 날 아침

일요일이 밝았습니다. 일요일 아침이지만 저희는 작업이 있습니다. 젊은협업농장은 365일 쉬는 날이 없습니다. 빨간 날에 농작물들도 자라다가 멈춰주고, 진딧물들도 잠깐 쉬면 좋은데 사정을 안 봐줍니다. 새벽에 자다가 등판이 뜨근거려서 깨니 4시 30분쯤이었습니다. 어젯밤에 추워서 보일러를 좀 올려뒀더니 이번에는 너무 올라간 것 같습니다. 지수가 자다가 보일러를 꺼버렸기에 망정입니다. 누워서 말똥말똥 멍 때리다가 이럴 거 조리동에 가서 커피 먼저 한 잔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대충 씻고 옷 갈아입고 일찍 나섰습니다. 새벽별이 정말 보기 좋았습니다. 조리동 옆 사방은 어둡고 별만 보이는 곳에서 눈은 뜨고 입은 벌리고 그대로 서서 하늘만 몇 분 보다가 들어갔습니다.

오늘 아침 메뉴는 감자, 고구마, 빵, 달걀이었습니다. 3일째 비슷하거나 같은 것이라 속이 더부룩할 만한데 아직은 별 말이 없습니다. 바쁘게 준비를 하고 마무리 할 때쯤이 되니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옵니다. 아침 식사 후에 오늘의 작업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의 아침 식사 풍경

협업농장 작업

오늘 학생들이 하는 작업은 쌈채소 재배입니다. 저는 첫날 조금 해본 터라 어떻겠구나 지레짐작을 했습니다. 학생들은 상추와 또 다른 채소를 하나씩 손으로 따면서 재배를 했는데 사실 수확해야 하는 물량이 많지 않아서 오전 11시까지만 하면 마무리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일요일이기도 해서 오전 작업만 잡혀있기도 했고 오전에 성서강의, 저녁에 협업 농장 젊은이와의 만남도 잡혀있었습니다. 작업과 강의가 모두 있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라서 좀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저는 또 어제 내용을 갈무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가보니 준서는 재배가 된 채소가 담긴 박스를 옮기고 있습니다. 힘든 것 같아 보이는데 괜찮다고 대답합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니 포즈를 취합니다. 많이 지친 것 같지는 않아서 안심을 하고 하우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들어서서 보니 나머지 네 명이 앉아서 상추를 따고 있습니다. 작업에 방해가 될까 싶어 사진 몇 장 찍고 오후 일정 공지 하나 하고 바로 나왔습니다. 쌈채소 따는 게 단순 노동이라 솔직히 화단 만들기처럼 재미있지 않습니다. 그저 앉아서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합니다. 이러다 보니 쌈채소를 따면서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넓혀가고,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농작업을 하다가 지루하면 타령이 나왔을 텐데, 이 곳 협업농장에서는 반복 작업에 지루하면 대화를 붓으로 삼아 이런저런 생각의 그림을 그려보게 됩니다. 그렇게 나온 그림들이 어떤 기회가 되기도 하고,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크게 보자면 진로와 농적 삶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특히 이곳은) 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11시경 해서 작업이 마무리됐습니다.



쌈채소 재배 중



쌈채소 상자를 옮기는 준서

오후 일정

워낙 오전 중에 잡혀있던 강의가 취소됐습니다. 홍순명 선생님의 성서 강의였는데 홍순명 선생님은 풀무학교 교장 선생님을 역임하셨던 분입니다. 그물코 출판사 책방에서도 홍순명 선생님의 저서가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됐습니다. 그런데 취소라니 아쉬움은 가득했지만 다음에 또 다른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오후 4시라고 잡혀있던 협업농장 젊은이와의 만남도 7시 30분으로 밀렸습니다. 이렇게 되니 오후 시간이 텅 비어버린 겁니다. 산을 탈까 얘기를 살짝 꺼내보니 역시나 표정들이 탐탁치가 않습니다. 저희를 담당하는 분이 광천 새우젓 축제를 던져봅니다. 볼 게 없다는 이야기가 덧붙긴 했습니다만. 이러다가 일요일 오후가 다 끝나겠다 싶어서 일단 학생들을 작업에 보내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그러다가 떠오른 것이 홍동에 있던 만화방입니다. 갓골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ㅋㅋ 만화방'을 한번 가보자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안 했는데 만화방은 미끼였고 밝맑 도서관에 가서 침묵과 독서를 한 번 더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밝맑 도서관은 일요일에 쉰다는 걸 다시 듣고는 알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없습니다. 만화방에 가야죠. 만화방이 쉴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니 마침 이런 게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어른이든, 청소년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다 같이 모여서 보드 게임을 하는 이벤트였는데 마침 오늘인 겁니다. 학생들에게 미션을 줬습니다. 만화방에 가서 만화책을 봐라. 그런데 보드게임에 참여해라. 이것도 이 지역을 이해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지역민들과 만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은 여유있게 버스를 타러 나갔습니다. 지난 번 갑자기 나타난 버스가 생각이 나서 미리미리 나갔습니다. 버스 타고 갓골에 도착을 했는데 행복 나누기라는 식당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갓골 일정에서 먹어보고는 모두 맛있다 했던 곳인데 일요일에 쉽니다. 그 덕에 그 앞에 있는 홍주성으로 갔습니다. 홍주성은 짜장면 집입니다. 안에 들어섰는데 자리는 절반 이상이 찼고 꽤 분주해 보였습니다. 주문을 해놓고 기다리자니 시간이 꽤 걸립니다. 40분 이상을 기다렸는데 중간에 가서 보니 주방에 아저씨 혼자서 바쁘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일요일에, 그것도 점심에, 한 명이 조리하고 서빙까지 하다니. 짧은 생각으로 '이거 이래서 장사가 되겠나' 싶었습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계산을 하면서 '혼자서 하시느라 많이 바쁘시더라고요'라고 말씀을 드리니 서빙을 하시는 아주머니가 수술을 하셔서 못나오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아, 생각이 짧았다 싶었습니다. 계산대 뒤에는 모든 재료의 원산지가 국산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여기도 생미 식당처럼 이 지역 농산물을 쓰는 건가 싶어서 여쭤봤더니 그렇다고 하십니다. 앞에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지역 농산물 구입해서 쓰는데 타산이 안 맞아서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던지셨습니다. 지역 농산물을 안 쓰자니 대부분 고객층인 지역민들 눈치가 보이고, 쓰자니 벌이는 줄고, 이것도 고민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어제 생미식당에 갔을 때 6,000원에서 7,000원으로 인상한 고지문을 붙여놓았던 게 생각이 나서 가격을 올리시는 게 낫지 않겠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게 하나 문 닫으면 지역 농산물을 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게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주인되는 분은 조심스러워하시는 눈치였는데 지역 농산물을 쓰는 것이 어떤 의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어떻게 보면 상생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농산물을 써라. 그리고 가격은 인상시키지 마라. 물론 이건 제 억측에 가깝고 주인되는 분의 기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둘이 서로 얽혀서 공생을 하는 관계라면 일방 통행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농적 삶에서 배운 게 이런 모습은 아닙니다.



휴식 시간

보드 게임

점심 식사 후에 모두 만화방으로 갔습니다. 제가 식사 계산을 마치고 만화방으로 가니 이미 아이들은 책을 하나씩 들고 자리를 틀어잡았습니다. 오기 전에 보드 게임 이벤트 담당하는 분과 통화를 미리 한 터라 그 분과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저를 알아보시길래 누구신가 했더니 목요일 꿈뜰 허브데이 때 꿈뜰에서 직접 담근 간장 판매를 담당하던 분이셨습니다. 저희가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좀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두 팀 정도가 게임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결국 저희만 모여서 게임을 진행하게 됐는데 한편으로는 아쉬웠습니다. 지역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습니다. 저희가 했던 보드게임 이름이 ‘딕싯’이었는데 모두들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카드 그림을 보고 연상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그 카드가 무엇인지 찾는 방식이었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게임인가' 싶다가 연상되는 한 마디를 생각해내고 그에 맞는 그림을 추론해내고 찾는 과정을 점점 거칠수록 상당히 괜찮은 게임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단순히 주사위 던지고, 규정에 따라 움직이면 되는 게 아니라 그림을 보고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을 해야 하고, 그에 맞는 그림이 뭘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 카드들을 심리치료에 쓰는 경우도 있는 모양입니다. 지수는 저녁에 우리 학교에 맞게 새롭게 일러스트를 그리고 카드를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제안도 했는데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반해버린 보드게임 '딕싯'



우리가 참여한 게 바로 이것!



만화방 입구 계단

규빈이 물병

보드 게임을 한 번 돈 후, 남은 시간은 만화를 보거나 자유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버스 시간이 4시 55분이니 그에 맞게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따로 별품 매장에 구경가보겠다 하고 나왔습니다. 일요일과 월요일에 쉬는 건 그 앞에 가서 알았지만요. 간 김에 규빈이가 물병을 잃어버렸다 해서 게스트 하우스에 다시 들렀습니다. 주인 아주머님께서 청소를 하고 계셨는데 여쭤보니 나온 게 없다 하십니다. 근처 더 찾아보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오려 하는데 안에 들어가셔서 원래 커피 담는 통으로 쓰인 플라스틱 병을 하나 내오십니다. 물병이 없을 테니 일단 이걸로 대신 쓰고 있도록 전해주라 하셨습니다. 규빈이가 물병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더 귀한 물병을 얻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보내셔도 괜찮은데 오히려 신경써서 새로운 물병을 챙겨주셨으니 잃어버린 거 못 찾아도 속이 많이 상하지는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아, 규빈이의 물병은 전혀 예상 밖의 장소에서 발견이 됐습니다. 내일부터 묵게 되는 400년된 동네 고택(오누이 예절관) 옆에 운동기구들이 있습니다. 협업 농장에 들어올 때 거기에 잠깐 짐을 놓고 쉬었었는데 그 운동 기구 옆에서 발견이 된 겁니다. 이제 규빈이 물병은 두 개입니다. 하나는 집에서부터 챙겨주신 관심이 들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갓골에서 없는 동안 쓰라고 챙겨주신 관심이 들었습니다.

그물코 출판사, 느티나무 헌책방

들어서기 전부터 피아노 독주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헌책방 한 켠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습니다. 누구든 가서 연주를 할 수 있죠. 들어서기 전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데 연주가 수준급입니다. 한 여성 분이 피아노를 치고 계시는데 귀에 익숙한 곡부터 새로운 곡까지 앞에 악보를 펼쳐놓고 연주를 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눈은 꽂힌 책들을 보고 귀는 피아노 소리에 기울이고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조금 있으니 만화방에 있는 줄 알았던 규빈이가 들어섰는데 나중에 규빈이도 정말 잘 치시더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을 보니 감탄을 했나 봅니다. 느티나무 헌책방이라는 작은 공간이 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평온하고, 느슨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입니다. 직원이 앞에서 서서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고 안 사고는 자유이며, 책을 사려면 책 이름을 노트에 적고 돈을 통에 넣으면 됩니다. 그곳은 단순히 책을 사러 가는 공간이 아닙니다. 뭔가 생각이 나도, 생각이 막혀도 가기 좋은 곳이고, 피아노를 치고 싶고, 연주를 듣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한쪽에 앉아서 멍때리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장식품은 없지만 꽉 차 있는 그 곳이 느티나무 헌책방입니다.



야생 고양이라고 하긴 하는데 갓골 주민들이 모두 함께 키우는 고양이라고 하는 게 맞을 듯



규빈, 피아노 그리고 고양이



고양이

다시 협업농장으로

모두 버스를 타고 협업농장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마을회관에서 짐을 빼서 오누이 예절관으로 가는 날었습니다. 오누이 예절관은 워낙 지어진 지 400년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고, 그 고택을 기본 틀은 그대로 두고 내부 공사를 하고 외부를 단장한 한옥입니다. 400년 전이면 조선시대인데 그때도 여기 사람이 살고 있었는가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드리니 임응철 이장님 조상 대대로 씨족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이장님은 말그대로 이곳의 터줏대감인 셈인 겁니다. 지금도 하루 한 시간 버스가 들어오는 이곳에 예전에는 어떻게 오가고 살았나 궁금해서 그때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을회관에서 2박을 하고 이곳으로 옮겨온다고 말씀을 들었었는데 알고 보니 3박이었습니다. 저희는 짐을 다 싸서 끌고 온 터라 수고스러웠지만 다시 마을 회관으로 향했습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시 협업농장으로



마지막 날인 줄 알고 찍어둔 마을회관

저녁은 된장찌개였습니다. 감기 기운이 조금씩 오는 게 느껴져서 오늘 저녁 준비는 아이들에게 맡겼습니다. 저는 한쪽에 앉아서 감놔라, 배놔라 하며 준비가 되는 과정을 지켜봤죠. 두부, 파, 양파를 썰고 된장을 풀어 큰 들통에 담아서 국을 끓였는데 솜씨들이 좋습니다. 저도 된장찌개를 사실 끓여본 적이 없어서 잘 됐다 했습니다. 저희 학생들을 지도하는 이은정 선생님도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하려니 7시 15분쯤이 됩니다. 15분 후에는 지역 청년과의 만남이 진행됩니다. 급한 마음에 아이들을 재촉하고는 저도 강당으로 나갈 채비를 했습니다.



함께 끓인 된장찌개

지역청년과의 만남

급히 강당으로 들어서니 모두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만남의 주인공은 황준수라는 청년으로 젊은협업농장에서 1년째 생활하고 있는 청년입니다. 관련된 영상을 보니 21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큰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6개월 간 진행된 연두 프로젝트에 참여한 영상과 귀국 후 3개월 정도 한 무전 여행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제가 21살 때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되새김질을 해보게 됩니다. 질문 시간이 됐을 때 저는 무전 여행 때 정말 돈 한 푼 안 들고 갔는지 물었는데 5만원 정도 챙겨서 출발했다는데 그 돈은 안 썼고 모두 가는 곳마다 농사 일을 돕고 밥을 먹고 하는 식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해 다녔다고 합니다. 강의가 마무리 된 후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영상 보는 중

지수

여행에서 느꼈던 걸 위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설명식이 된 것 같아요. 글쓰기를 하면서 여행을 했다면 정리가 많이 됐을 텐데. 글쓰기를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규빈

일단은 지수 말처럼 약간 느낀 점이나 그런 것을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실에 대한 것만 이야기를 해서 아쉬운 면이 있어요. 봉사가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실질적으로 계속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좋다고 생각했어요. (연두 프로젝트)

경빈

적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한 바를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에 대해서. 계획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실천 하느냐는 다른 문제. 제가 대안 학교를 다니는 입장에서 대안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이런 얘기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저도 강의 내용이 했던 것들에 대한 나열이라서 그 과정 안에서 더 깊은 것들을 이야기해줬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은기

저는 어제 들었던 강의보다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어제 내용은 여기 철학을 장황하게 설명했는데 사실들을 나열했지만 그래도 농적 경험을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었고 참 좋았다고 생각했어요. 지역 상관없이 여러 곳 다녔던 게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청년들이 이렇게 하는 또 다른 곳을 두 곳 더 알게 됐어요. 경빈이와 마찬가지로 대안학교 졸업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저는 경빈과 은기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대안학교를 다니지만 대안학교 졸업생들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지 저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일반 학교 학생들이야 수능 준비해서 대학 간다는 '공식'이 있어서 그 틀 안에서 생각을 하게 되지만 대안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그 틀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간은 막연한 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만남은 학생들에게 한 가지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 같습니다.

작당, 두 번째 시간

피곤함을 무릅쓰고 낭만 찻집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30분이라도 이야기를 해야 다음 연결고리가 생기고 흐지부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실행 가능한 것들부터 생각하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중고책 판매를 어떤 공간을 빌려서 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생각했던 앞마당에 공간 만들기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금전적, 행정적인)이 껴 있어서 바로 진행이 힘드니 공간은 공간대로, 실질적인 작업은 작업대로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중고책 판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가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졸업 여행 재정 확보 관련 이야기가 나왔다가, 학교가 지역 사회의 거점이 되는 구상이 튀어나왔다가 이야기의 초점이 이리저리 옮겨갑니다. 처음에 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여기서 본 것들, 배운 것들 중 좋은 것을 갖고 가자는 취지였는데 잘못하면 '사업 아이템'을 끌어가는 식이 되어버리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찰나에 가만히 듣고 있던 은기가 한 번에 정리를 해줬습니다.

"엊그제 정민철 선생님 강의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농촌이든 도시든 마을을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우리가 중고매장을 하고, 중고책을 팔고, 지역의 중점이 되고 하는 건 당장에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시작된 건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었거든요. 숨어있을 수 있고, 책을 볼 수 있고, 조용히 있을 수 있는 공간.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기 말이 맞았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너무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큰 그림도 작은 선부터 시작인데 말입니다. 저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공간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수첩에 간단히 그려두었던 공간을 학생들과 공유했습니다. 사방이 2미터 길이로 된 작은 집 모양으로 그렸는데 마당 한 쪽에 이걸 만들어서 놓으면 6명 정도는 들어가 앉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앞마당을 어찌하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지 않을까 해서 생각을 해뒀던 거였습니다. 지수는 제 설명을 듣고 벌써 스케치가 들어갑니다. 규빈이가 저번 시간에 내놓았던 열풍기 아이디어도 적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제 공간 만들기에 초점이 잡혔습니다. 다음 시간 이야기할 내용은 어떤 재료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지을까 입니다. 공간 이름은 제가 마음대로 생각해서 내놓았습니다. '숨통'이라고 했는데 '숨을 수 있는 통'이라고 할 수도 있고 정말로 숨통이 트인다고 할 때 숨통도 되니 이렇게 적당한 이름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통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숨통 제안

하루를 마치며

학생들은 씻고, 일기 쓰고, 자라고 들여보내놓고 저는 조리동으로 향했습니다. 저녁 즈음부터 몸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여차하면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리 준비를 해둬야겠다 싶었습니다. 빵이며 잼이며 챙겨놓고, 밥을 올려놓고는 잠깐 앉아서 일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홍성에 온 지 7일차가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루를 길게 사니 일주일 같은 느낌이 안 듭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만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닌 듯합니다. 계속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고, 배움이 이어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니 지나간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집니다. 생각이 멈추고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되어 뭔가를 끊임없이 찾고 생각하게 됩니다. 학생들도 입으로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기도 하고 힘들다고도 하지만 속은 저와 같지 않을까 합니다.

덧붙이기

오전에 학생들이 작업을 들어간 사이, 어제 강의를 해주셨던 정민철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게 될 기회가 생겼습니다. 저 앞 쪽에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라고 물으시길래 넙죽 "네!"하고 받았습니다. 주시는 커피 한 잔 얻어먹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이야기를 나누게 될 테니까요. 오누이 강당 앞 커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정민철 선생님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학교에 대한 이야기, 협업농장에 대한 이야기,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 이곳에 오는 청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그러다가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됐습니다. 대안학교 졸업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대안학교들도 같은 고민을 하는 지점이 '진로'입니다. 일반학교들이야 대학에 넣어버리면 한숨 돌리고 끝날 수 있는 것이지만 대안학교는 학생들의 이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풀무학교도 거쳤던 고민의 과정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졸업 후 (즉,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까 생각을 해도 나오는 게 있겠는가 말씀을 하시는데 학교 안에서만 키우면 이렇게 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저의 고등학교 시절과 학원 강사를 하던 때 만났던 학생들의 얼굴이 스쳐갔습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보낸 청소년들이 대학에 들어간 후 찾는 건 또 다른 시험들. 공무원 시험을 보는 건 공식처럼 되어버렸고 안정을 찾아 도서관의 불을 밝히는 학생들의 모습이 겹쳤습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졸업을 하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라는 질문에서 생각이 멈췄습니다. 직업 교육을 시켜주는 곳이 아니지만 졸업 후 그래도 뭔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성을, 최소한 헤쳐나갈 수 있는 '뚝심'이라도 줄 수 있는 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맹목적으로 도서관을 오가다가 시험 치고 결과 기다리다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는 그런 삶이 아니라 최소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저는 출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꺼내봤습니다. 학교 내에 출판사를 두고 한 번 해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눈 적이 있다 말씀을 드리니, 딱 한 마디 해주셨습니다. 학교 내에 두지 말고 밖으로 빼라고요. 학교 내에 있으면 그 틀에만 갇히게 된다고. 이 학생들이 학교 안에만 있다가 나가게 되면 밖(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또 고민을 하게 된다고. 그러니 밖으로 빼라고 하셨습니다. 학교 반경 1km 내에 출판사를 두고 학교와 지역, 지역과 학교를 연결해주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렇게 되면 학생들에게는 또 하나의 교육의 장, 인큐베이터, 전진 기지가 될 수 있는 곳이 됩니다. 또 출판사 업무를 실질적으로 배울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요.

정민철 선생님과의 대화 후에 그림이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팔을 한 번 걷어붙여볼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지금까지 마셔본 중 가장 비싼 커피를 마셨습니다.

생각 하나 더하기

'대안학교 졸업생들을 인터뷰해서 책으로 엮는다면 일석이조겠다.'
전체 2

  • 2017-10-23 22:33

    정말 가장 비싼 커피이네요^^ 숨통..좋으네요.. 이번달 말 작은출판사 대표를 만나러가는데요 저도 이것저것 이야기나누고픈 게 많아지네요. 몸살기운이 심해지지않기를 바래요♡


  • 2017-10-25 09:00

    제가 분명 읽은 글인데, 다시 보니 읽은 만큼의 글이 또 있네요!
    몸도 안좋으신데 자세한 일지까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