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적 삶 1일차

작성자
김 학민
작성일
2018-10-20 22:09
조회
943
1일차 (10월 20일 토요일)

새벽 6시 10분 경.

주섬주섬 일어나서 방 건너편 탕비실로 향했습니다.

아침공기는 으슬으슬하지만 신선합니다.

외투를 입었지만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찬 기운에 어깨를 잔뜩 움츠리게 됩니다.

탕비실에 들어가 냄비를 꺼내고 욕지도에서부터 갖고 온 고구마를 삶기 시작했습니다.

어제 멀리서부터 오느라 저를 포함한 모두가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6시 30분이 되면서 모두 일어나 나갈 준비들을 시작했습니다.

고구마도 적당히 삶아졌습니다.

젓가락을 푹 찔러보고는 들어서 접시에 담아냅니다.

농장으로

7시. 저희 세 명은 농장으로 향했습니다.

농장에는 농장 분들이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통성명과 인사를 한 후에 성훈과 지영은 다른 분들과 함께 8번동으로 이동합니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학생들이 작업을 하는 동안 저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농장 일을 하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겠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있습니다.

제가 함께 하면 학생들은 저에게 기대게 됩니다.

농장에서 어떤 학생들을 받든지 간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정책입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 배우게 됩니다.

오전 시간.

학생들을 보내놓고 저는 음식들 장을 보러 나섰습니다.

추수를 기다리는 벼들이 빼곡한 논들 사이를 가로질러 10분 정도를 걸으면 마트가 나옵니다.

지영이가 먹고 싶다고 한 만둣국 재료들을 샀습니다.

떡볶이 재료도 사고 아침에 먹을 빵과 우유도 챙겼습니다.

떠나기 전까지 먹을 식자재들을 모두 담으니 큰 박스로 하나가 나옵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서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나가면서 보니 성훈이와 지영이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쌈채소를 재배하고 있습니다.



고구마밭 정리 중인 지영

땅이 아깝다는 말

저는 오누이 강당으로 들어가 내년 학교 아침농사에 심을 작물들을 생각해봤습니다.

감자, 옥수수, 오이, 수박, 사과참외, 완두콩...

작년 겨울에 아침농사 기획을 할 때 농부들은 남는 땅을 아까워하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서도 무슨 이야기인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학생들이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는 휴식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텃밭이지만 정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밭을 구상하다 보니 땅 아까운 줄은 몰랐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남아있는 공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뭐든 심어야 합니다.

밭의 모양도 공모해서 디자인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가운데 일직선으로 통로 하나 두고 나머지는 전부 밭으로 만들면 됩니다.

내년에 학교 밭을 무엇으로 채우나 고민을 하다가 강당 밖을 살짝 내다보았습니다.

첫날이라 잘들 하고 있나 궁금했습니다.

멀리 성훈이와 지영이가 보였습니다.

다른 농장 분들도 고구마 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고구마를 캐고 계십니다.

가서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괜히 방해가 될까,

그리고 다들 바쁜데 옆에 서서 사진을 찍자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나가지 않고 안에서 한 장 찍어두었습니다.

사실 안에 있으니 몸이 근질거립니다.

나가서 뭐라도 돕고 싶은데 성훈이와 지영이가 함께 하는 모둠 말고는 다른 작업 모둠이 없어서 저는 작업할 게 없습니다.



오누이 강당에 숨어서(?) 찍은 사진



점심식사 중인 성훈

여기 음식은 맛없는 게 정말 없습니다.



농장 옆 논에는 고개숙인 벼들이 한창입니다.

저녁 때가 다 되어갑니다.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입니다.

만둣국 육수를 끓이고, 파, 양파를 썰어놓고는 지영이와 성훈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탕비실



하루 해가 저물기 시작합니다.



달이 하늘의 빈 자리를 대신합니다.

초대

둘이 돌아오기 전에 전화가 하나 왔습니다.

학생들을 담당하는 협업농장 김현주 선생님의 전화였는데

저녁 때 고기를 구워 먹을 예정이라고 초대를 해주셨습니다.

만둣국은 내일 아침에 먹기로 했습니다.



첫날부터 고기라니.

하루 닫기

참 궁금했습니다. 오늘 하루 여기 농장에서 일하면서 어떤 대화와 생각들을 했는지.

도란도란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먼저 연습으로 학생들에게 두 장씩 주고 이야기를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성훈이는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치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지영이는 튤립을 따다가 꽃이 꺾어져서 울고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 앞에 웃는 가면은?"

이렇게 물었더니, 마음은 슬프지만 겉으로는 보여주지 않는 것이라고 답을 합니다.

이번에는 난이도를 높여서 3장으로 이야기를 만듭니다.



지영이는 이 아이가 다이아몬드를 발견해서 핸드폰으로 연락하고는 집에 돌아가 엄마한테 칭찬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연결했습니다.

성훈이는 이 사람이 목표를 발견했는데 그 목표는 자신의 가창력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이야기로 연결했습니다.

중간에 진주를 찾은 것은, 이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찾아낸 것을 나타내는 그림이라고 답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카드 2장을 뽑아서 나오는 그림을 오늘 상황에 맞게 이야기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지영이는 낚시 그림을 보고 오늘 고구마를 캐다가 꽤 큰 고구마가 나온 것이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그때 너무 좋았다고 합니다.

옷을 들고 있는 그림은 아침에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작업을 나갈지 고민하던 때와 연결해서 이야기합니다.



성훈이는 첫번째 카드를 보고 앞으로 남은 기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번째 카드를 보고는 그래도 오늘 하루가 잘 끝나서 다행이고 일정이 끝났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해보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지영이도 성훈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문. 오늘 작업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지영 - 너무 많아. 힘들어. 지쳐. 언제 끝나. 집에 가고 싶어. 초코 보고 싶다.

성훈 - 저는 진짜 지난 4년 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쭉 떠올려 보면서 한 해를 사실상 마무리하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지영 - 성훈이가 성숙해지는 것 같아요. 아직 장난기가 있기는 하지만.

문. 오늘을 보내는 소감은?

지영 - 언제 (집에) 가요? 초코 보고 싶어요.

성훈 - 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앞으로 배워가는 것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하루일기를 쓰는 지영

위 이야기까지 마무리한 후에 하루 일기를 쓰고 9시에는 잘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서 8시까지 늦잠을 잡니다.

일요일이지만 11시 30분에 밝맑 도서관에서 강의가 있습니다.

강의 후에는 홍동을 소개해주고 슬슬 산책을 다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만화방에도 다녀오고요.

탕비실에서 성훈이와 잠시 대화를 하다가

밖을 보니 지영이가 방에 들어가서 이불과 베개를 옮겨줍니다.

어제 남자방에 이불, 베개가 부족해서 여자방에 있는 것을 갖고 오겠다고 이야기를 해뒀는데

고맙게도 지영이가 먼저 옮겨준 겁니다.

덕분에 오늘은 좀 더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성훈이가 오늘 쓴 글을 함께 나눕니다.

어제 제가 정수기 물통을 바꾸는 걸 보면서 성훈이가 남긴 생각입니다.

 

<정수기 물을 채우면>

정수기 물통에 물이 다 비어서 물을 채웠다.

새로 채우자 바로 거품과 물이 올라오며 소리가 난다.

새로 변화가 오면 늘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학교도 2014년에 개교하고 4년이 지났다.

나가는 아이들과 들어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힘들고 문제도 생기고

그에 반면 즐거운 일도 있었다.

물이 들어오며 소리가 나고 나가면서 거품이 일듯이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성훈이가 본 그 정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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