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품는 학교

작성자
최껄껄
작성일
2017-03-08 15:15
조회
20
수원의 서쪽 끝 화성시와 접하고 있는 칠보산 밑에 ‘자목’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곳은 8. 9년 전만해도 둥글고 굽은 길, 먼지가 쌓여있는 오래된 집들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굽은 길이 펴지고, 먼지 쌓였던 집이 성냥갑 마냥 반듯한 건물로 대체되면서 그 풍경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넘쳐나고 길가에는 주차할 공간을 찾기 힘듭니다. 새로 지은 건물들은 음식점들이 차지하고 앉아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흙길은 아스팔트로 바뀌고 오래된 경로당 앞의 노인들은 의자에 앉아 알록달록한 등산객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곳의 일상이 바뀌었습니다.

 

일상이 바뀐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서수원지역에는 예부터 작은 공동체들이 자생해왔습니다. 생협, 협동육아, 방과후, 공부방, 대안학교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여기선 직선과 효율로 대표되는 도시공간의 철학을 지양하고 굽고 둥근 공간, 흙을 갈아 먹을 것을 내는 공간, 삶터가 일터가 되는 공간을 꿈꾸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것들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얽히며 그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있는 곳. 칠보산 밑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칠보산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엮어줍니다.

 

박승규의 『일상의 지리학』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영어단어 ‘ecistence(ex/istence)’의 어원에 따르면, 존재는 자아 중심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향한 탈중심성을 갖고 있다. 존재에 대한 모토는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밖으로 나가! 인식론적 주체가 되지 말고 윤리적 행위자가 돼라!’가 되는 것이다. 곧 존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동의가 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가에 따라 생명을 품은 존재는 비로소 자신을 규정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가치를 느낍니다. 나를 품고 있는 공간을 보면서 그 공간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시간을 함께 반복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바로 일상입니다. 일상이 바뀐다는 것은 공간이 바뀐다는 말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 공간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련미가 없더라도, 투박하고 거칠더라도, 이 공간에서 우리의 일상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칠보산 밑 자목마을에서는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자기 삶을 살아냅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연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서로를 강요하지 않고, 통제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4년 전, 이런 토양에서 ‘평화로운 숲 중등 수원칠보산자유학교’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2004년에 추진위 모임이 발기해서 2005년에 개교를 한 초등학교는 올해로 12년차를 맞습니다. 2012년 10월 초등 교사회에서 초등의 철학을 잇는 중학교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듬해 2월에 <중등 추진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그 결과 중·고등 통합과정의 5년제 학교가 2014년 2월에 개교했습니다. 우리 학교의 정식명칭은 ‘중등 수원칠보산자유학교’이지만 이 앞에는 언제나 ‘평화로운 숲’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이는 ‘자유와 생명의 공동체’라는 초등의 철학을 심화한 표현인데 ‘자유로운 개개의 나무들이 생명의 끈으로 모여 있으면 평화로운 숲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학교철학은 이 공간이 주는 의미를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의 토양에서 각기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자생해온 여러 공동체들이 칠보산 자락의 품에서 이보다 더 커다랗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서수원 작은 마을의 지역공동체.

 

지난 3월 4일에 학교입학식이 있었습니다. 자기 입학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형식이었는데, 어느새 4년 동안 이어온 전통이 되었습니다. 개학은 2월 22일에 했지만 자기 입학을 준비하느라 2주간의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연대를 꿈꿉니다.

이 토양에서 칠보산이 공급해주는 영양분을 에너지 삼아 성장해온 여러 공동체가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기 원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환영해주고, 함께 성장하길 원합니다. 중등 수원칠보산자유학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생명입니다. 먼저 태어나 자리 잡은 공동체들의 연대와 도움이 없었다면 자목마을에서 시작하기 어려웠을 것입니이다. 작은 구멍가게를 차리려고 해도 자본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현실에서 꿈과 열정만으로 시작한 우리학교가 한 걸음씩 걷고 있습니다. 그 걸음이 아직도 서툴고 힘겨워보여도 우리를 지켜보고 품어주는 마을 공동체가 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꿀 수 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터전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다시 세상 어디론가 날아가 평화로운 씨앗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아이들이 날아가 뿌리내린 곳에서 다른 공동체들과 연대하며 평화로운 숲을 이루기 원합니다. 평화의 씨앗이 세상을 향해 더 많이 날아가 더 많은 숲을 만드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지역에서 자생한 공동체가 서로 연대한다는 것은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원합니다.

공간이 나를 규정합니다. 우리는 공간을 닮아갑니다. 이 공간은 곡선과 직선이 함께 공존합니다. 효율과 성장의 철학이 이 공간에도 흘러들어와 굽은 것들을 펴 놓았고, 먼지 쌓인 것들을 말끔하게 청소해놓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공간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옆에 있던 메타세콰이아 숲이 없어졌습니다. 그 앞에 우리가 둥지를 틀었던 도토리교실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침농사 시간에는 여전히 텃밭에서 날아오는 딱따구리 소리를 듣습니다. 비가 오면 마른 흙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고, 밭을 갈기 전에는 여기 저기 쌓아놓은 퇴비 때문에 똥냄새가 납니다. 시간의 흐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고, 아침, 저녁으로 다른 공기의 변화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는 이 공간이 주는 관계의 연결망, 생명의 끈으로 연결된 우리, 평화로운 숲을 꿈꾸는 소망, 공동체의 연대가 주는 안전함을 꿈꾸며 아이들을 키우고 싶습니다.

직선으로 대표되는 도시공간은 속도와 효율을 강조합니다.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처럼 우리는 어느 순간 목표를 상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속도 그 자체를 즐기는 말초신경의 욕구만을 채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런 세상 속으로 날아가 연대를 이루고 생명을 살리는 희망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팰릭스와 가타리의 책, 『천개의 고원』을 강의했던 이진경은 그의 책 『노마디즘』 1권에 이런 주석을 해놓았습니다.

“나아가 들뢰즈나 가타리 각자도 이미 그 각각이 살고 사유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나고 끌어들였던 많은 사람들, 혹은 많은 사람들의 집합인 셈이고, 그래서 ‘각자가 여러 명이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하지만, 그것은 들뢰즈나 가타리, 혹은 푸코나 맑스, 나아가 지금까지 제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섞여서 발화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혼자 말하는 경우에도 각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말하는 것이고, 그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배치 안에서 나름의 집합적인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이것을 저자들은 뒤에서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관습에 의해 두 사람의 이름으로 책을 쓰고 있지만, 이는 '나'라고 말하든 그렇지 않든, 별로 중요해지지 않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라고 하지요.”

 

오늘도 이 공간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많은 공동체들이 각자의 꿈을 가지고 그 역할을 해내며 살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 공간은 생명력 넘치고 아름다운 공간이 될 것입니다. 누구의 기여도나 몫을 계산하는 이 없이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지점에 이르는 꿈을 꿔봅니다.

 

서로를 닮아가고 인정하며 평화의 공간을 만드는 우리가 되는 것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닌 지점에 이르기 위해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삶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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